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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b 2022. 2. 11. 20:59

from 남한산성, 김훈

 

1.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엉켜 있었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았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

2.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3.
흐린 날은 일찍 저물었다.

4.
갇혀서 마르고 시드는 날들이 얼마나 길어질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고,
...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았다. 누구나 알았지만 누구도 입을 벌려서 그 알고 모름을 말하지 않았다.

5.
죽지 말아야 한다는 복받침과 닥쳐올 날들의 캄캄한 어둠

6.
기우는 해가 깊이 들어서 그림자가 길고 수척했다.

7.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8.
분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9.
눈 쌓인 우듬지가 햇빛을 튕겨 냈다. 바람이 마른 숲을 흔들면 빛의 줄기들이 부딪쳤다. 잎 진 나무들은 줄기만으로도 길차고 싱싱했다.

10.
적막은 맹렬해서 쟁쟁 울렸다.
...
말들은 몰려왔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11.
밝음과 어둠이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날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12.
빛이 사위어서 물러서는 저녁의 시간들은 느슨했으나, 어둠은 완강했다.
...
어둠 속에서는 가까운 것이 보이지 않았고, 멀어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가까워 보였다.
...
아무도 아침과 저녁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

13.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낮게 깔려서 뒤섞이고 부딪치는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났다.

14.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 줄로 이어지는 자리에서 삶의 길은 열릴 것이므로,

15.
시간은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환란의 시간은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다시 맑게 피어나고 있으므로, 끝없이 새로워지는 시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었다. 모든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 새벽의 시간은 더렵혀질 수 없고, 다가오는 그것들 앞에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Posted by nighthawk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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