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18

L/w 2013. 10. 13. 04:52





1.

각종 미디어나 인터넷을 접하다 보면, 심심찮게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류의, 

한국 양궁의 사기성에 대해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 사례들이 보이곤 한다.




2.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벌판에서 떼로 우와아앙하고 몰려오는 짱개들의 수탈이나,

배타고 쳐들어오는 왜놈들에 대비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으로도 효율적으로 적을 도륙해야 했다.

쟤들은 쳐들어왔다가 수틀리면 도망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여기서 밭갈고 논에 물채워서 먹고살아야 하는지라, 인명의 손실은 우리쪽에게 훨씬 손해니까.

따라서 '원샷원킬이 가능하다면 아군의 피해없이 적을 도륙할 수 있는' 활에 능해야만 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대륙과 섬을 잇는 반도에 위치했다는 짜증나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으쓱)

활쏘기에 대한 한 다른 민족은 꿈도 희망도 없는 실력을 갖춘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으쓱으쓱)...는 식이다.

어쩌다가 다른 관점에서 전개되는 근거도, 조선시대 펼쳐진 강려크한 유교정치의 일환으로

국내의 반란을 막기 위해 함부로 칼을 수련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이것저것 절차밟아 이칼로는 반역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깜지쓰고 수련해야하는 칼보다 

편하게 뒷동산에서 쏠수있는 활이 애용되었으며 그결과 우리는 길가던 아이돌도 

어느날 활잡아서 쏴보면 9점짜리정도는 우습게 맞추게 되었다는 정도.




3.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거 없다.

뭐 예로부터 중국의 창, 한국의 활, 일본의 칼이라고는 했다지만...

그런식으로 말하면 윌리엄텔과 로빈훗은 뭔데.

100년전쟁의 사기유닛 잉글리쉬 롱보우 무시하나여?




4.

한국이 처음 양궁을 시작했을때, 이 나라는 양궁의 불모지였다.

불모지도 그냥 불모지가 아님 막 까뒤집고 공구리친 직후의 사대강 비스무리한 상태.

일제 30년이 끝난 후의 한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이전의 5000년 역사와는 완전히 단절된,

그냥 새로운 신생국이었고(그래서 난 이 나라의 유구하신 역사는 50년짜리라고 본다), 

그 점은 양궁이라고해서 전혀 달라질 것이 없었다.


1960년대 한국 양궁이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외국과 견주어 경쟁력이 있다고 정부가 판단한 종목만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지만

그때 양궁은 출전하지 못했다.

10여년이 지난 70년대 중반에도, 

한국내에서는 우왕 나 국내신기록 내쪄염! 했던 선수가 

일본에 가면 저희 조기궁도회에 어서오세요 취급이었다.




5.

뭐 국궁이 있었지만, 국궁과 양궁은 엄연히 다르다.

양궁이 초기에 공구리친 직후의 사대강이었다가 지금은 DMZ수준의 청정함을 보이는 반면에,

국궁은 현재의 녹조라떼 사대강 정도의 수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일단 국궁에 대해서는 좀이따가 쓰기로 하고.




6.

그럼 한국 양궁이 언제부터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느냐.

양궁의 첫 세계대회 우승이 저 조기궁도회 취급으로부터 불과 몇년 후의 일이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빠르고 안정적으로 성장했느냐.

opertation cwal 도 show me the money도 안되는 한국에서 어떻게? 

사실 이게 이 글이 w에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7.

특별한거 없었다. 사업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지켰을 뿐.

명료한 목적의식, 이를 실현하는 섬세하고 유연한 계획, 안정적인 지원,

그리고 확고한 의지.




8-1.

60년대 초. 정부에서는 양궁을 전국체전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다.

이를 통해 전국의 초중고에 양궁부가 생겼고 양궁에 몸담는 아이들이 자라났다.

무릇 한 종목의 성패는 국가대표가 아니라 자국내 리그가 결정짓는 법이다.


8-2.

우리나라의 훈련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어느정도냐면 훗날 외국 선수단이 우리나라 선수단에게 훈련의 비기를 묻자,

그냥 우린 이러이러하게 해요. 라고 말해줬을 뿐인데

저것은 비열한 아시안의 훼이크일 것이다 절대 사람이 저렇게 할수있을리가 없어-_-; 라고 받아들였을 정도. 

그때 들어줬던 몇가지 예들이 3일간 재우지 않고 행군하기, 목에다가 뱀감고 쏘기,

야구장에서 욕설과 쓰레기 맞아가면서 연습하기 등등...

사선에 서는 단 3초를 위해 살인적인 훈련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8-3.

그리고 이거 중요한건데. 

한국 양궁은 그냥 실력만 좋으면 무조건 국가대표가 될수있다.

나이 어려도 된다. 중3만 넘어갔고 실업팀에 속해 있으며, 일정 점수 이상을 한번이라도 기록했던

모든 선수들이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한다. 실제로 중3짜리가 당시 현역 선수들 제끼고 국대로 나는 경우도 많고.

국내리그의 치열함이 세계리그의 치열함을 넘어서는데 걸리는 시간은 몇 년되지 않았다.


8-4.

선수들의 활은 몇달에 한번씩 교체해줘야 한다.

하도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오래되면 장력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

그러나 한국은 양궁 강국이 된 이후에도 활은 계속 외국산을 수입해서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90년대까지 세계 최고의 양대 활 제조사중 하나였던 미국의 호이트사(다른 한곳은 야마하)가

애틀랜타 올림픽 직전에 한국 선수들에게 활 공급을 돌연 중단,

훈련하던 활을 들고 시합을 하게된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 일부를 미국에게 뺏기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매우 빡친 한국은 활 또한 국산화! 를 결정.

문제는 한국에는 활만드는 회사가 한곳도 없었다.

그나마 활 비스무리한 거라도 만드는 곳이 있었는데 거긴 장난감회사-_-;

통짜 롱보우가 아닌 양궁에 쓰는 합성활은,

수지를 여러겹 겹쳐서(*-_-*) 만들며 따라서 이 수지의 재료와 수지를 붙여주는 접착제가 

활의 성능을 결정짓는 요소다.

근데 장난감활 만드는 회사에서 그걸 어떻게 알아....

결국 양궁 지도자들과 장난감 회사 연구원들은 자신들의 영혼과 육신을 활에 갈아넣기 시작한다.


8-5.

그리하여 메피스토가 한국의 활 연구실에서 연구원들과 모종의 계약을 치르게 된 후,

활을 일단 국산화하기는 했다. 근데 이거 구려. 구려도 너무 구려...그러면 아무도 안쓰잖아.

그래서 초/중 전국 체전에서 쓰이는 모든 활들은 국산을 사용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든다.

그 결과, 국산 업체에 투입된 막대한 민간자본이 훌륭한 제품으로 산출...된게 아니라,

전국체전이 빠칭코가 되어버린다-_-;

경기 결과가 예상이 안됨. 전혀. 전교에서 제일 잘쏘던 넘이,

대회 나가니까 활이 화살하나 쏘고 부러졌네? 엉엉 예선탈락 하는식이면 누가 양궁하나여?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렇다고해서 엎지 않아요.

아 양궁이 전국체전 종목이라니까? 하여튼 우승해서 올림픽 가야지.

니네 하나하나의 미래는 중요하지 않아 일단 이거들고 쏴봐하며 

우린 이렇게 아이들의 미래를 담보로 걸고 실전을 통해 활에 대한 데이터를 쌓음.


8-6.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양궁계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게 되었다.


강력한 한국양궁 → 한국 선수들의 유니폼, 걸음걸이, 스트레칭 동작까지 베낀다 → 활도 걔들꺼 쓴다

→ 양대 활 제조사중 한곳이었던 야마하, 활 사업부문 전면 철수, 호이트는 점유율이 절반이상 하락.

→ 현재 한국 메이커인 삼익과 윈앤윈의 시작독점이 머지않음.

(한국 선수들중 일부가 호이트제 제품을 사용중이라, 호이트마저 망하기는 어려울듯 보임)


한줄요약 : 호이트가 엄한 짓 했다가 가만있던 야마하가 활 사업을 접고 삼익과 윈앤윈의 독주체재가 완성,

(당시 연구원들의 영혼을 대가로 구린 활을 주었던 메피스토는 그 업보로

90년대 중반 한국에 디아블로, 바알등의 형제들과 함께 소환되어 수없이 도륙당했다고 전해진다.)




9.

세계대회 우승을 통한 국위선양이라는 명료한 목적의식, 

이를 실현하는 청소년인재 양성과 활 국산화라는 섬세하고 유연한 계획, 

엘리트 체육인 중심주의를 택한 국가의 안정적인 지원,

그리고 이를 이끌어가는 한국 양궁연맹의 확고한 의지.

이를 통해,

우리나라는 1963년 국제양궁연맹에 가입한지 16년 만인 1979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석권한다.




10.

한편 아까말한 한국 국궁의 경우, 올림픽 종목이 아닌 관계로 마스터플랜조차 없었던 탓도 있지만,

대한 궁도협회의 부패 문제로 인하여 현재의 국궁의 마이너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일단 국궁은 기준이라던가 정석이라는게 아직도 논쟁중(...)이라,

의외로 활터는 우리 주변에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각 활터마다의 전통이 모두 다르다-_-;

대한 궁도연맹은 이외에도, 공인대회에서 사용되는 모든 궁시의 가격을 [고정] 하는 삽질을 저질렀는데,

문제는 이게 현재진행형...

메이커도 듣보잡인게 가격은 20만/60만원...

니들이 살고있는 남한사회의 자본주의는 X까라그래라고 일갈하는 그들에게서

뭔가 북쪽의 붉은 아웃사이더의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위엄이 하도 삼엄하여 대중의 시선에서 아웃됨...




11.

그러니까 이런거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한국 양궁의,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의거한 사기성은 사실 십수년간의 개고생을 통해

어렵게 얻어낸 값진 결실이라는 거지. 결코 아이코 21세기에 태어나봤더니 명궁의 유전자가 요기잉네? 가

아니라는 거다.


그냥 되는건 없다.

그리고 되는것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마지막으로 그 이유는 참신발랄한게 아니라 매우 상식적인 것이다.




12.

하지만 대부분의 말아먹는 케이스들은,

그저 해야한다는 안이한 목적의식과,

쓸데없이 섬세한 주제에 변태적인 무지막지함을 자랑하는 계획,

까라면 까, 안되면 되게하라는 식의 지원과

과정이 중요한거니까 이쯤했으면 만족해도 좋아라는 박약한 의지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곤 한다. 





0.

이건 여담인데.

양궁 훈련을 할때, 초월적인 높이에서의 번지점프도 자주 실시한다고 한다. 

문제는 처음 뛰어보는 경우, 남여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

남자 선수들은 10명중 8명이 번지대까지 한번에 올라간다.

여자 선수들은 10명중 2명만이 뛰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그렇게 번지대에 올라간 남자 10명중 2명만이 한번에 뛰어내린다.

나머지 8명은 마음먹는데 꽤나 오래걸린다고.

반면 여자 선수들은 일단 번지대에 섰다면 10명중 8명이 한번에 뛰어내린다.

소리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침착하게.


....라고 한다.

그리고 메달을 쓸어오는 여자 양궁. 

남자 양궁의 경우 주로 단체전에서 빛을 보는 편이다.


여담의 여담.

이 훈련을 실시하는 이유는, 담력을 기르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단체전에서 사순을 정하는 데에 필요한 데이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높이에 대한 위험을 훈련에 대한 믿음으로 단번에 뛰어내리는 담력은 

첫번째로 사선에 서서, 시작의 중요성에 쫄지않고 자신의 실력을 믿으며 대차게 팍! 중앙을 쏘아내야 하는 

사수에게는 필수적인 덕목이므로.


어떠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단 하나의 데이터로도 

여러가지의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눈빛만 보고 그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는것처럼.


Posted by nighthawk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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